구매해두고 언제 볼까 아껴두던 영화를 주말이 되어서야 보게 되었다. 그 유명한 Less but better
문구를 말한 사람, 모듈러 선반을 디자인한 사람, 지금 애플 디자인에 영감을 준 사람이 모두 한 사람이라니. 영화를 다 보고난 후에 이 영화는 단지 디자인에 관한 다큐멘터리 필름이라기보다는 그 너머를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모듈러 시스템 그리고 그의 사상을 보고 프로그래밍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설명서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제품
이어야 하고 모듈식 시스템
으로 떼어내도 각각 작동하며 어떤 제품에든 합쳐질 수 있다는 점이 그러하다. 이건 마치 주석 없이도 읽히는 코드와 소프트웨어 모듈화 설계가 아닌가. 다큐멘터리가 끝날 때 즈음에는 그의 철학에 동화되어 집에 있는 의미 없어 보이는 제품들을 버리고 싶은 지경에 까지 이른다. 그럼 이제 디터 람스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부터 알아보자.
디터 람스는 대변동을 겪은 전쟁이 끝난 50년대 초부터 디자인을 시작했다. 그는 목수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자연스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테크니컬 아트 컬리지에 입학한 디터 람스는 건축에 흥미가 생겨 들어간 ABB
건축 회사에서 BRAUN
으로 회사를 옮기게 된다.
건축가로 들어갔지만, 브라운의 설립자인에르윈과 아르투르 형제는 디터 람스에게 라디오 디자인의 프로토타입을 보여주고 함께 해보자고 말하게 된다. 디터 람스는 건축가로서의 커리어는 잊고 이때 부터 제품 디자인 작업을 하게 된다. 브라운의 설립자 에르윈은 모든 건 더 좋아져야 한다고, 더욱더 모던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브라운에서 그가 함께 일한 울름 대학 출신의 디자이너들은 모듈러 느낌과 정제된 선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브라운의 주된 수입원은 플래시 부품에서 면도기로, 면도기에서 가전제품으로 이어 가게 된다. 아래 사진은 백설 공주관
이라고도 불리는 브라운의 턴테이블 SK4
의 모습이다.
디자인 수장으로서 브라운을 이끌던 그는, 브라운이 질레트에 인수되면서 회사를 떠나게 된다. 브라운을 떠나고 그는 VITSOE
라는 가구 회사에 입사하여 본격적인 가구 디자인을 하게 된다. 이때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모듈 선반은 지금 시대 인테리어에서 빠질 수 없는 가구가 되었다. 실제로 디터 람스는 한 집에서 50년 동안 이사를 한 번도 하지 않고 살고 있다. 집에 있는 가구도 마찬가지이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이 디자인한 제품들로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과연 어떤 디자이너가 몇십 년이 지나도 자신의 제품에 만족하고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디터 람스는 오래 지속되는 디자인을 위해 1970년대에 좋은 디자인의 10가지 원칙
을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지속 가능성에 대해 말한 것이 인상적이다. 1970년대에는 전쟁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 다들 화려한 디자인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사람들은 화려하고, 유행을 타는 디자인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닫고 디터 람스의 사상과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한다.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한다.
좋은 디자인은 미적인 것이다.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좋은 디자인은 과시하며 드러내지 않는다.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좋은 디자인은 오래 지속된다.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다.
좋은 디자인은 환경 친화적이다.
좋은 디자인은 최소한의 디자인이다.
디터 람스의 좋은 디자인 10가지 원칙은 7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혼잡함 속에서 ‘나의 디자인은 좋은 디자인인가?’에 대한 고찰로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 원칙이 영원할 거라고 말하지 않는다.
2016년 Vitra에서는 Modular World
라는 이름의 디터 람스 전시를 열었다. 이 전시는 람스의 가구 디자인에 주안점을 둔 최초의 전시회다. 람스는 가구 디자인이 그의 디자인 철학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브라운 가전제품보다 훨씬 더 직접적으로, 가구를 통해 어떻게 사람들과 세상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그의 가구를 보면 가구 하나하나가 특정한 삶의 방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느껴지는데, 물건을 더 낮게 놓고 쉽게 바꿀 수 있도록 제품을 유연하게 만드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모듈 의자와 테이블이 그 예다.
또 개인적으로는 의자가 가구 디자이너에게 중요한 이유가 항상 궁금했는데 이 파트에서 그 이유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의자는 자유로운 공간에 놓인다. 테이블은 무언가에 가려져 있을 것이고 침대는 공개적이지 않다. 또, 옛날 시대를 생각해보면 의자는 항상 권력이자 정치의 상징이었다. 이 모든 것들이 디자이너가 의자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만든 이유라고 한다. 가끔은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에 판매되는 의자들을 보고 의문을 가진 적이 있는데, 어느 정도 그 의미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그가 말하는 디자인 원칙이 어디에도 적용될 수 있음에 놀랐다. 특히 요즘 읽고 있는 실용주의 프로그래머에서 하는 말과도 비슷한 부분이 많다고 느껴졌다. 예를 들면, 서문에서 말했던 것처럼 제품 그 자체가 설명할 수 있게 해야 한다거나 유지보수가 용이해야 한다거나 하는 부분에서 그러하다. 어떤 분야이든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기술을 넘어 어떠한 철학이 그 기술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 같다. 브라운의 제품들은 실제로 고가에 판매되고 있는데, 4560 디자인 하우스에서 열리는 전시를 통해 브라운의 제품을 볼 수 있다고 하니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언제?) 보러 갈 예정이다. 주말을 멋진 영화와 함께 마무리하며 보내주련다. 잘 가라 내 주말..!